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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서적 추천] 시의 감성으로 탄생한 산문집 <사람은 사람을 안아줄 수 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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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서적 추천] 시의 감성으로 탄생한 산문집 <사람은 사람을 안아줄 수 있다.>

허니앨리 2020. 9. 3.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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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책을 고를 땐 10페이지 정도를 읽어보고 고르곤 하지만,

크게 따지지 않고 덥석 손에 쥐는 예외의 순간들이 있다. 바로 작가가 시인인 경우이다.

시인인 작가가 에세이집을 냈다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믿고 보는 고질적인 습관을 지녔다. 

 

아무래도 내가 처음 에세이라는 매력에 빠진 책이 이병률 시인의 책이었기 때문이리라. 

 

어쨌든, 이번에도 저번 시간에 이어 독립출판물 중 좋았던 에세이를 추천할 생각인데, 

바로 이도형 시인의 '소품집'이라 쓰고 '에세이'라 읽는 <사람은 사람을 안아줄 수 있다>이다. 

 

 

 


사람에겐 상처를 주는 것도, 그 상처를 보듬어 위로해 주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을 안아줄 수 있다>는 관계 속에서 지쳐가는 사람들을 향해 너무나도 확신에 가까운 어투의 제목을 던짐으로써 따뜻한 위로를 건네어준다. 

작가가 시인이신데다, 이 책을 '소품집'으로 명명한 만큼

어떤 상황이나 오브제에 대한 시적인 묘사로 이루어진 문장이 많이 등장한다. 

 

마음에 와닿는 글귀가 많았지만 몇 가지 문장만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 타버린 공간과 시간이 폐허를 이룬다.

하지만 지면 아래 숨어 있는 불씨들.

잔불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바람에 재가 날리고 언제 다시 불이 번질지 모른다. "

- p.16

 

 

" 그녀는 그에게 작은 방을 마련해 줬다. 

그는 그녀에게 작은 방을 마련해 줬다. 

각자는 세입자였지만,

각자는 다시 마음을 빌려줄 수 있었으므로. "

 - p. 25

 

관계의 단상. 

 

 

 

 

" 우리의 중력과 달의 중력이 

서로를 얼마나 그리워하여 

영원할 것처럼 물결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까. "

- p.28

 

 

 

" 얼마나 많은 세계의 구석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문장들을 쏟아냈는지 셀 수 없다."

- p.37

 

시인이 쓰는 에세이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단 한 문장도 버릴 문장이 없기 때문이다. 

시를 쓰며 단련이 된 그들은 에세이라는 산문글에서도 한 문장 한 문장 모두 시로 만들어 버린다. 

놀랍다. 생각의 부피에 어떻게 이렇게나 깊숙이 침투할 수 있는지.

 

 

 

그녀는 말했다.

 

이 세계는 지금 출생과 사망이 전부 신고되고,

전 세계의 사람이 전부 몇 명인지 매일 집계되는 세상이야. 우리가 살 수 있을까?

 

그는 말했다. 

 

어떤 세계는 탄생과 죽음을 누구도 알지 못하고,

사람들이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서로 아무것도 몰라요. 그걸 산다고 할 수 있을까요?

"

- p.54

 

 

언젠가부터 혼자가 편하다는 생각을 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 너무 많은 말과 마음과 관심. 그 속에서 나는 가끔 숨이 막혔다. 

오롯이 혼자인 시간을 겪어 내면서 나는 타인에게 건네던 말과 마음과 관심을 나 자신에게로 돌렸다. 외롭다는 생각보다는 완전하게 꽉 차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건, 옆에 누군가가 있냐 없냐의 차이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허전한가 아닌가로 나뉘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가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언제나 나를 사랑해주는 누군가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옆구리가 허전해질 때 찾을 수 있는 누군가, 나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혼자인 시간이 결코 외롭지 않은 시간으로 꾸려질 수 있다.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사회적인 동물이다. 

 

 


" 떠나기 전에 하나만 물어볼게요. 눈물은 어디서부터 흐르는 거죠?

믿을 수 없는 믿음에서부터요. "

 -p.90 

  

 

" 내가 지금 당신을 떠올리는 건가요.

아니면 내가 지금 당신을 잊고 있는 건가요. "

 - p.78

이 책을 선물해 준 동생이 보내줬던 구절.

아마 누군가를 잊고 싶다는 마음을 계속해서 떠올린다는 것은 그 누군가를 떠올리기 위한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책을 다 읽은 후, 독립서적을 판매하는 사이트에 들어가서 이도형 작가의 책 소개를 읽었다. 

 

어떤 말보다 간결하고 강렬했던 포옹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언어와 우리 사이의 길을 걸어와 

말없이 가슴과 가슴을 포개었습니다. 

 

그럴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안아줄 수 있다는 문장이 

소망이 아닌 의지의 문장인 이유입니다.

 

 

우리는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 사람과의 관계의 초석을 쌓아 나간다. 

하지만 언어야 말로 양날의 검을 가진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사람의 의도를 멋대로 재해석하고 스스로 옮겨다니기 일쑤다. 그렇게 멀어진 관계를 가장 가까이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포옹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로의 체온과 체온을 나누는 것. 그것은 어떤 말보다 강력하고 어떤 거리보다 가장 가깝지 않나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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